한산대첩은 임진왜란 판도를 바꾼 해전으로 세계 3대 해전으로 꼽히기도 한 혁신적인 해상전투입니다.
세계 3대 해전은 살라미스, 칼레, 트라팔가르 해전을 말하는데 여긴 서양 중심의 사관을 기준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인데 그럼에도 세계 3대 해전에서 한산대첩을 더해 세계 4대 해전으로 불립니다.
세계 3대해전 또는 세계 4대 해전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단순히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소탕하였기 때문만은 아니고 기존의 전투 또는 전쟁 방식과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해전을 치러 전쟁을 판도를 바뀌게 한 해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기존의 전쟁과 전투방식을 벗어나 새로운 전략, 전술을 사용하여 해전사의 전환점이 된 해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살라미스 해전
살라미스 해전은 기원전 492년에서 448년까지 벌어진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 벌어진 전쟁 중 대표적인 주요 전투 중 하나인데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대규모 해전입니다.
기원전 480년 전 살라미스 해협에서 페르시아가 800척의 해군 전력으로 그리스의 소형 함대 380척을 사로니코스 만에 가두어 놓았는데 이때 그리스의 테미스토 클래스 사령관이 페르시아 함대를 좁은 살라미스 해협으로 유인하여 페르시아의 대규모 함대가 움직이기 힘들게 되자 그리스는 함선 앞쪽에 나무로 뾰족한 모양을 만들어 배로 돌격하여 페르시아 함대에 부딪혀 배를 침몰시키거나 상대 함선의 노를 부수는 전략을 사용하였고 일부는 상대 배에 올라 육탄전을 벌여 결국 그리스는 40척을 잃은 대신 페르시아 함선 200척을 격침시키고 200척을 포획하는 등 대승을 거뒀습니다.
이로 인해 해군으로 보급을 하려했던 페르시아 군은 모두 철수하여 그리스는 최초의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살라미스 해전이 세계 3대 해전으로 기록된 이유는 기존의 전쟁에서는 해군은 육군병력을 수송하거나 배를 상대편 배에 붙여 근거리 전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살라미스 해전으로 기존 전투와는 전혀 다른 배로 적 함선을 들이받는 전략을 최초로 사용하여 전쟁의 판도를 바꾼 해전이었습니다.
칼레 해전
칼레 해전은 1588년 영국과 스페인이 벌인 해전인데 당시 무적함대를 자랑하던 스페인이 자국의 은을 약탈하던 영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였고 영국 해협 주변에 있는 칼레 지역의 앞바다에서 해전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영국과 스페인은 각각 포격전술을 사용하였는데 이때 영국 해군과 스페인 해군의 목적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스페인은 스페인 육군을 영국에 상륙시키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고 따라서 수송선을 호위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으나 영국은 이를 막기 위한 함선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해전으로 서로 함포사격을 하는 전투를 벌였으나 포탄과 화약이 떨어진 스페인 함선이 후퇴하다 태풍을 만나 괴멸되었습니다.
인터넷 상이 다른 블로그나 많은 정보들이 영국이 스페인보다 장거리 포격을 하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사실 영국과 스페인의 대포들은 대부분 같은 나라에서 만든 대포를 수입한 것이어서 같은 대포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칼레 해전으로 스페인이 칼레 해전에서 전투로 인해 손실된 함선은 거의 없으나 태풍으로 인해 대부분의 함선을 잃었는데 칼레 해전이 왜 세계 3대 해전으로 불리게 되었냐 하면 기존에는 노를 저어 충 격하겨나 서로 상대방의 배에 올라타 백병전을 펼친 전술이 대부분이었으나 칼레 해전으로 배에서 포격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노를 젓는 배의 시대에서 돛을 달아 바람을 이용한 범선의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해상전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트라팔가르 해전
트라팔가 해전은 1805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영국을 침략하려 하였고 이를 영국의 넬슨 제독이 막기 위해 해상전투를 벌였던 해상 전투가 트라팔가 해전입니다.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군이 스페인의 트라팔가르 곶 서쪽에서 33척의 프랑스 함대와 영국의 넬슨이 이끄는 27척의 함대가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의 해상 포격전은 서로 배를 일렬로 쭉 늘어뜨리고 마주 보면서 서로 대표를 쏘아대는 방식이었습니다.
프랑스는 일반적인 전투 방식대로 프랑스 함대를 일자로 쭉 늘어뜨려 일자진을 만들고 있을때 넬슨도 프랑스와 같이 일자진을 만들지 않고 쭉 늘여뜨린 함대 한가운데를 향해 배들을 11자 형태로 돌격하여 프랑스 함대의 가운데를 가로 질러 뚫어버리고 그 가운데서 포격을 하였습니다.
당시 함대의 지휘체계는 깃발로 명령을 전달하는데 프랑스군이 쭉 늘여뜨린 진형에서 가운데가 단절되자 서로 명령이 전달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영국의 배에서는 옆면에 대포를 많이 장착하고 있어 측면 대포의 화력으로 각개 격파 당해 영국이 대승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트라팔가르 해전은 기존의 배를 일자로 쭉 늘여뜨려 서로 마주 보며 단순 포격전을 펼치던 방식에서 조직적이고 변화무쌍한 함대 운용술을 보였다는 점에서 새로운 변화라고 평가하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서양의 시각에서 그런 것입니다. 이미 이순신이 육지에서의 전술을 바다에서 보여주며 학익진을 펼친 것이 트라팔가르 해전보다 200년이나 앞선 1592년에 전략 전술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한산대첩(한산해전)
한산 해전은 1592년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이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경상 우수사 원균과 합동으로 학익진을 펼쳐 일본의 와키자가 야스하루가 이끄는 73척의 왜선을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익진을 펼쳐 격파한 해상전투입니다.
한산대첩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전라 우수사 이억기의 함대를 합쳐 48척으로 합동훈련을 펼쳤는데 이후 경상 우수사 원균이 7척을 합세해서 55척이 되었습니다.
이후 이순신은 견내량에 일본 왜선이 73척이 들어갔다는 첩보를 듣고 적을 한산도 인근으로 유인하기 위해 6척의 함선을 보내 적을 공격토록 하였는데 일본의 와키자카는 기습을 준비하던 중 기습작전이 들켰다고 생각하여 이 참에 본인의 휘하에 있던 모든 왜선을 총 출격토록 하여 조선 함선 6척을 추격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그리고 견내량을 통과하여 한산도 일대 넓은 바다에 도달하자 이순신은 학익진을 펼쳐 일제 함포사격을 통해 일본 왜선을 격퇴하였습니다.
한산대첩에 의해 일본은 47척이 격침되고 12척이 나포되었으며 겨우 14척만 도주하였는데 이로 인해 조선이 일본에 반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산대첩은 지금까지 배를 적의 배 옆에 붙여 백병전을 펼치거나 근접거리에서 활이나 조종을 쏘는 등 근접거리 해상전투가 일반적이었으나 해상에서 육지에서 펼쳐지던 진법을 바다에서 육지와 같이 진법을 펼쳐 승리하였다는 것이 큰 의의입니다.
이는 트라팔가 해전보다 200년 이상 앞서서 진행된 전투이기 때문에 사실 트라팔가 전투보다 더욱 가치가 있지만 서양의 기준에서 세계사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세계 3대 해전에서 한산대첩이 빠지고 트라팔가 해전이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세계 4대 해전을 꼽을 때 한산대첩이 들어가는 이유입니다.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꼭 알아야 할 상갓집 예절(장례식장 예절) (0) | 2022.08.31 |
---|---|
꿀벌이 사라지는 이유와 우리에게 벌어질 일 (0) | 2022.08.16 |
동물의 평균수명 정리(가장 오래 사는 동물) (0) | 2022.07.27 |
메로구이 메로가 뭐지? (0) | 2022.07.21 |
화장실 청소 쉽고 깨끗하게 하는 방법 (0) | 2022.07.13 |
댓글